대야성소개

대야성유통 주식회사

대야성은 합천의 옛이름 ‘대야주’의 성이름입니다.대야성유통(주)는 평소에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대야성 열일곱집식구의 몇몇이 뜻을 함께 모아 설립한 농축산물 유통법인 입니다.

고향소식을 공유하고,유용한 정보를 향우들께 유통시키고,고향의 산지농축산물을 외지 향우들께 유통시킴은 물론 도시인들께 온라인쇼핑몰을 통해 유통시키고 있습니다

향우들의 살아가는모습,고향향우들의 땀흘려 일하는 모습들을 소개하며,고향거주향우와 외지향우들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대야성 유래

본래 대가야의 땅으로 전략적 요충지였으나, 장군 이사부에 의해 함락된 뒤로는 신라의 옛 가야 지방에 대한 지배 거점이자 대 백제전선의 주요한 방어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지리적 요충지다보니 시대를 막론하고 수없이 전투가 일어났다.

선덕여왕 시대에는 642년 백제 장군 윤충이 함락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을 죽이면서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시발점이기도 했다. 김춘추의 사위이자 성주인 김품석의 부하 모척과 검일의 배반이 결정타였다.그리나 배반자 검일은 훗날 신라가 사비성을 함락했을 때 결국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 때문에 대야성의 방어기능을 좀 더 경주에 가까운 압독주로 옮겼으나, 660년 백제가 멸망하여 대야성을 다시 수복한 이후 661년에 주의 중심지를 다시 대야성으로 옮겼다.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신라의 영토가 다시 경상도 지역으로 쪼그라든 후삼국시대에는 견훤의 침략을 막아내며 신라가 수십 년간 버티게 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의외로 견훤은 대야성에서 몇 차례 막혀서 신라 본진을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견훤이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공세에 920년 결국 함락당하였다. 이후 후백제 장수 추허조가 지켰는데 927년에 고려의 김락이 함락하였고, 928년에 후백제의 관흔이 왕충이 이끄는 고려군을 북방으로 유인한 후 신속히 남하해 대야성을 다시 점거하는 등 주인이 계속 바뀌다 결국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때는 합주 관할이었다.

대야성전투

대야성은 경남 합천지역에 위치한 신라의 성으로 원래는 대가야의 영역이었으나 562년(진흥왕 23)에 장군 이사부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었다. 가야에서 고을이 가장 컸기 때문에 대야성이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성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서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 의자왕이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성을 지키고 있던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그의 부인 고타소는 자결했다. 죽임을 당했다는 말도 있다. 성주인 품석이 부하 검일의 처를 빼앗음으로 해서 검일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검일은 백제가 공격해 올 때 성안의 창고에 불을 질러 성을 위기로 몰고 간 것이다.당시 죽죽은 김품석의 보좌를 하고 있었다.이에 김품석은 항복하면 살려 준다는 말을 듣고 항복하였으나 백제의 속임수에 빠진 것을 알고 김품석은 처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그러자 죽죽은 남은 병졸을 모아 성문을 닫고 백제군에 대항하였지만, 결국 대야성은 백제군에게 함락되고 죽죽도 용석과 함께 전사하였다. 어쨌든 이때 신라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이 성을 빼앗김으로써 경주가 백제의 공격에 바로 노출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신라는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김춘추가 고구려에 원병을 청했지만 실패하고 당에 손길을 내밀어 당과의 연합관계가 성립되었다.

이제 백제와 신라는 낙동강을 경계로 마주보게 되었다. 백제는 강만 하나 건너면 대구 벌판에 다다를 수 있게 되었다. 신라 사람들은 더 큰 재앙이 닥쳐올까 전전긍긍했다. 신라는 백제를 막기 위해 수도 경주에서 가까운 경산에 병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때 가야계 김유신에게 백제로부터 수도를 방위하라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 위기 상황에서는 실력자가 등용될 수밖에 없으므로 김유신에게 정예 사단이 맡겨진 것이다. 김유신은 이 병력을 이용해서 나중에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김춘추와 더불어 신라의 실세로 등장하게 되니 결국 대야성 전투는 삼국 통일의 두 주역을 엮어서 신라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게 하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후 660년과 668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고 삼국이 통일됨으로써 대야성의 군사적인 가치는 줄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는 강양군으로 강등이 되었다. 그러나 이 대야성의 값어치가 다시 올라갈 날이 생기게 되니, 다름 아닌 한반도가 후삼국 시대로 분열될 때 부터였다.892년, 견훤이 완산(전주)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했다. 드디어 후삼국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이에 자극을 받은 궁예는 894에 양길로부터 독립해 898년 7월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듣고 양길이 분을 참지 못하고 궁예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고 크게 패했다. 그 여세를 몰아 궁예는 한반도 중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901년에 고구려(후고구려)를 세워 왕위에 오름으로 본격적인 후삼국 구도가 확립되었다.
궁예가 고구려를 세울 때인 901년 8월에 견훤은 야심차게 대야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만큼 대야성이 견고했기 때문이다.

죽죽장군과 죽죽정신

원래 대야주(大耶州, 경상남도 합천군) 사람으로, 찬간 학열(?熱)의 아들이다. 즉 지방 토착민. 서라벌에서 부임해 온 대야 성주 김품석을 옆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642년 8월에 백제 장수 윤충이 군을 이끌고 대야성으로 쳐들어왔는데, 예전에 김품석은 부하 검일의 아내가 아름다워 그녀를 빼앗은 적이 있어 검일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검일은 윤충과 내통해 군량고에 불을 질렀고 식량이 부족해 백제군에 맞서 방어를 계속하기가 어렵게 됐다.
윤충은 김품석에게 항복하면 살려주겠으며 태양에 걸고 맹세한다고 하자 김품석은 이를 믿고 나가려 했다.“백제는 자주 말을 뒤집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필시 우리를 꾀려는 수작입니다. 만약 성을 나가면 틀림없이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니 쥐새끼처럼 엎드려 삶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호랑이처럼 용맹하게 싸우다가 죽는 게 낫습니다.”
죽죽은 직감으로 품석을 말렸지만 품석은 이를 듣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윤충은 약속을 어기고 먼저 나간 병사들을 죽여버렸고, 계략에 걸린 것을 안 품석은 처 자식을 죽이고 목을 찔러 자살해버렸다.

죽죽이 혼란을 급히 수습하고 겨우 성문을 다시 닫고 적을 막았다. 그러나 대장을 잃고 창고도 날아간 성에서 오래 저항하긴 힘들었고 용석이 항복하자 권했지만 죽죽이 말하길
“그대의 말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차가운 날씨에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뜻이다. 어찌 죽음이 두려워 살아 항복하겠는가?”

결국 끝까지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죽죽은 전사했고 선덕여왕이 이 소식을 듣고 죽죽을 급벌찬(6두품)으로 추증하고, 그의 남은 유가족을 서라벌로 옮겨와 귀족으로 살게 했다.
대야성이 비록 함락되기는 하였지만 나라를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던 그의 충성은 신라인들에게 계승되어 결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승화되었다.

합천 지역을 대표하는 충신이기에 조선 시대에 죽죽을 기리는 비석(신라 충신 죽죽 지비)을 세운 바 있다.그리고,지금 합천에는 “대야성”이나 “죽죽”의 이름을 붙인 행사가 많고,합천군의 공식 지역 축제인 대야 문화제에도 죽죽 장군 추모제가 포함되고있다